만남과
이별
사람은
일생동안 세 번의 큰 만남을 경험한다. 부모와, 스승과, 배우자와의 만남이다. 이 만남의
결과들은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만남에는 기대와 설레임이 있고 이별에는 예외
없이 고통이 수반된다. 그것도 정이 들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그 고통은 배가되는 법이다.
만해 한용운님은 『님의 침묵』에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여 만남과 이별의 양면성을 절묘하게 묘사했다.
만남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신학자 마틴 부버는 그의 명저『나 와 너』에서 만남의 대상을 수단으로
대할 때 불행은 시작된다고 했다. 예컨대 스승과 제자와의 만남이 가르치고 배우는 즐거움
이상이나 이하라면 이는 불행의 시작이다.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사랑 아닌 그 어떤
것이 더 큰 기준으로 작용한다면 불행은 이미 예약해 놓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신약성서에는
만남의 중요성을 소개하고있다. 예수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의 만남이 그것이다. 다섯
남편을 경험했던 여인의 한 서린 아픔을 예수는 조건 없이 수용했고, 동정 아닌 사랑과
관심으로 사려 깊게 배려했다. 만남의 결과는 좋았고 그녀의 인생에는 새로운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도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만남과 이별의 여정을 통해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별의 고통이
너무 커서 다시는 정(情) 주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마음대로 되는
문제던가? 지금은 세월의 때가 묻어 예전보다야 덜하지만 여전히 만남에는 설렘이 따르고
이별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동반된다.
이제
또 하나의 이별을 고해야할 시간이 되었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했던 만해의 싯구가
현실로 다가왔음을 확인해야하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의 칼럼을 오늘로서 마치게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독자들과의 만남이다. 그 동안 부족한 글을 읽고 격려와
충고를 보내준 독자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싶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빌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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